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르투갈 왕국 (문단 편집) ==== [[포르투갈 내전]] ==== 1826년 3월 4일, 주앙 6세는 예로니모 수도원에서 점심을 먹다가 갑작스러운 중병에 걸려 뱀포스타 궁전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구토, 경련 및 실신을 며칠간 지속하다가 3월 10일 오전 5시경에 사망했다. 주앙 6세 사후 브라질 제국 황제 노릇하고 있던 페드루 1세가 '''페드루 4세'''로서 포르투갈 왕위를 겸임하게 되었지만, 브라질 정부는 포르투갈의 군주인 사람을 섬길 수는 없다며 반대했고, 포르투갈 역시 아버지를 배신하고 황제를 칭한 그를 군주로 섬기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에 페드루는 5월 2일 포르투갈 왕위에서 퇴위하고 딸 '''[[마리아 2세]]'''를 포르투갈 여왕으로 세웠다. 하지만 마리아 2세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페드루의 누이인 이자벨 마리아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이자벨 마리아의 섭정은 극도로 불안정했다. 자유주의자들과 절대군주제 옹호자들 간의 불화가 정부를 지배했고, 시의회 내에서도 심각한 분열이 일었으며, 리스본에서 군사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상황이 이처럼 좋지 않자, 페드루는 미겔에게 포르투갈의 섭정을 제안하는 동시에 마리아 2세가 성년이 되면 결혼하라고 권유했다. 미겔은 형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포르투갈 헌법을 지키겠다고 맹세한 뒤 포르투갈에 복귀했다. 미겔은 초기에는 자유주의자들과 협의하며 국정을 그럭저럭 이끌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1828년 3월 13일 헌법에 명시된 대로 새로운 선거를 실시하지 않고 코르테스를 해산했다. 많은 귀족과 성직자, 몇몇 사회 인사들은 미겔에게 이참에 헌법을 페지하고 국왕으로 통치하라고 권유했다. 여기에 4월 25일 코임브라 대학 총회는 미겔에게 왕위를 차지할 것을 요청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미겔은 형과 완전히 갈라서는 것을 주저했지만, 어머니 카를로타가 적극적으로 권하자 마침내 마음을 굳게 먹고 1828년 7월 7일 정식으로 포르투갈 국왕 '''[[미겔 1세]]'''에 선임되었다. 마리아 2세는 영국으로 피신한 뒤 영국 당국의 지원을 호소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브라질로 돌아갔다. 미겔 1세의 즉위에 반발한 자유주의자들은 그를 축출하고 마리아 2세를 복위시키기 위해 각지에서 봉기했다. 1828년 8월, 오포르토의 수비대가 반란을 일으켜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자유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코임브라로 진군했다. 미겔 1세는 이에 대응해 군대를 소집한 뒤 오포레토를 즉시 봉쇄해 조기 진압에 성공했다. 라고스에서도 반란이 일어났지만 라고스 군영 내 자유주의파 장군이 미겔파 장군에게 총살당하면서 진압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마데이라 제도]]와 [[아소르스 제도]]의 테르세이라 섬으로 피신하여 항전을 이어갔다. 마데이라 섬은 곧 포르투갈 해군에게 장악되었지만, 테르세이라 섬은 쉽게 굴복하지 않고 자유주의를 계속 따랐다. 1829년 3월 6일, 카이스 두 소도레에서 자유주의자들의 봉기가 일어났으나 곧 진압되었고, 모레이라 준장 및 장교들과 추종자들이 총검에 찔러 살해되었다. 그 해 5월 7일 모포르투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가 며칠 만에 진압되었고, 수비대원 전원이 총살되었다. 빌라 프랑카 데 시라에서는 지역 주민들이 자유주의에 동조하는 것으로 간주된 70여 명의 인사를 학살했다. 카를로타 역시 자유주의자들을 적대하는 성명을 여러 차례 발표하며 그들에 대한 탄압을 지원했다. 1830년 1월 7일 카를로타가 세상에서 잊힌 채 사망한 후에도 미겔의 이름으로 자유주의자에 대한 잔혹 행위가 지속적으로 자행되었다. 심지어 포르투갈에서 활동하던 영국인과 프랑스인들까지 공격당하자, 초기에 수수방관하던 두 나라는 미겔 정권에 반감을 품었다. 그들은 외교관을 잇따라 파견해 항의했지만, 미겔 1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에 프랑스 제독 알빈 레네 루생은 [[루이필리프]]의 지시에 따라 타구스를 항해하여 8척의 포르투갈 선박을 나포한 뒤 1831년 7월 14일에 선박을 돌려주는 대가로 희생된 프랑스인들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미겔 정부의 숙청은 지속되었다. 리스본에 주둔한 제4보병대는 1831년 8월 22일과 23일에만 29명의 정치범을 처형했으며, 대부분의 사형 선고는 24시간 이내에 집행되었다. 한편, 자유주의자들이 유일하게 버티고 있던 테르세이라 섬에서는 안토니우 주제 세베림 드 노로냐가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했다. 그는 방어 시설을 재건하고 군대를 훈련시킨 뒤 1829년 8월 11일 섬을 침공하려는 미겔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그의 군대는 1831년까지 아소르스 제도의 모든 섬을 장악했다. 이 무렵, 브라질 황제 직위에서 물러나 프랑스로 망명한 [[페드루 1세(브라질)|페드루]]는 [[라파예트 후작]]의 후원에 힘입어 외국 용병대와 자유주의 성향의 자원 부대를 이끌고 1832년 초 아소르스 제도에 갔다. 이후 몇달 간 재정비를 한 후 포르투갈 본토로 출발해 7월 9일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포르투에 입성했다. 이 소식을 접한 미겔 1세는 군대를 동원해 포르투를 포위하여 1년 이상 포위 공격을 가했지만 함락에 실패했다. 이후 영국이 페드루를 돕기로 결정하고 찰스 네이피어 제독의 해군을 파견하자, 미겔은 [[샤를 10세]] 몰락 후 미겔을 돕기 위해 찾아온 프랑스 장군 루이 오귀스트 빅토르를 비롯한 해외의 절대왕정주의자들과 스페인 왕국의 지원을 받으며 대항했다. 그러나 포르투를 향한 무리한 공세가 좌절되면서 기세가 꺾였고, 1833년 7월 5일 상 비센트 곶 해전에서 미겔파 함대가 찰스 네이피어가 이끄는 영국 함대에게 궤멸되고 7월 24일 안토니우가 리스본을 공략하면서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설상가상으로 1833년 9월 29일 [[이사벨 2세]]의 즉위에 반발한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스페인 역시 포르투갈처럼 내란에 휩쓸렸다. 이로 인해 스페인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된 미겔 정권은 페드루 1세 지지자들에게 속절없이 밀려났다. 미겔 1세는 이런 상황에서도 포르투갈 북서부에서 항전했지만 1834년 5월 16일 아세이세이라 전투에서 안토니우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하며 더 이상 저항할 힘을 잃어버렸다. 결국 엘바스 쪽으로 퇴각한 미겔 1세는 이 이상의 항전은 불가능하니 평화 협상을 제기하자는 전쟁평의회의 결의를 받아들였다. 이후 십여 일간의 협상 끝에 1834년 5월 26일 미겔 1세가 퇴위하고 지지자들과 함께 포르투갈을 떠나는 대신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는 에보라몬테 협약이 체결되었다. 미겔은 제노아로 향하는 영국 전함에 승선한 뒤 로마로 이동했다. 이후 포르투갈 코르테스는 미겔과 그의 모든 후손을 포르투갈에서 영구 추방한다고 선언하고 헌법 98조에 미겔의 후손들은 포르투갈 왕위를 이을 수 없다고 명시했다. 그리고 미겔 1세 이후 포르투갈에는 더 이상 전제군주가 나타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